기술을 만들 수 있는 시대, 어떤 기술을 만들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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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만들 수 있는 시대, 어떤 기술을 만들어야 하는가

― 효율을 넘어 사람에게 맞는 디지털 전환을 생각하다

 

우리는 지금 기술을 만드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전문적인 프로그래밍 지식이 필요했다. 개발언어를 배워야 했고, 데이터베이스와 서버를 이해해야 했으며, 무엇인가를 구현하려면 개발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특히 ‘바이브코딩’이라는 방식은 자연어로 원하는 것을 설명하고 AI와 대화하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 사회복지 현장의 실무자도 자신의 업무에서 느끼는 불편을 직접 작은 도구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이 변화는 반갑다.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직접 현장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술을 만들기가 쉬워졌다는 사실은 또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 기술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디지털 전환은 왜 필요한가

디지털 전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효율성이다.

반복적인 업무를 자동화하고, 데이터를 축적하고, 처리 속도를 높이고, 오류를 줄인다.

사회복지기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청과 접수를 디지털화하고, 기록을 정리하고, 이용자 정보를 관리하고, 반복적인 행정업무를 자동화하면 제한된 인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특히 사회복지는 늘 자원이 부족하다.

시간도 부족하고, 사람도 부족하고, 예산도 넉넉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은 분명 필요하다.

나는 효율성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효율성이 디지털 전환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순간이다.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업무가 빨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자동화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더 나은 서비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기술은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기술을 도입하면 분명히 좋아지는 것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더 많은 개인정보가 필요해질 수 있다.

기록과 데이터가 늘어나면서 감시가 강화될 수도 있다.

디지털 기술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서비스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AI가 사람의 판단을 대신하면서 당사자의 의견이 주변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측정하기 쉬운 것만 데이터로 남으면서, 측정하기 어려운 중요한 가치가 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사의 업무를 자동으로 측정한다고 생각해보자.

상담 횟수, 처리 건수, 프로그램 참여 인원은 쉽게 숫자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준 시간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렵다.

신뢰가 형성되는 과정도 측정하기 어렵다.

아무런 눈에 띄는 변화가 없지만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일 역시 데이터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디지털 시스템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설계되기 쉽다.

결국 기술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까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전환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술을 만드는 사람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 더욱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개발자와 IT 전문가가 기술을 만들었다.

현장 실무자는 개발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설명하고, 만들어진 시스템을 사용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하지만 생성형 AI와 바이브코딩이 등장하면서 이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사회복지사도 직접 작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필요한 업무도구를 만들어 볼 수 있고, 기존 시스템의 부족한 기능을 보완할 수도 있다.

이것이 단순히 ‘코딩이 쉬워졌다’는 변화로만 볼 수 있을까?

이는 기술을 설계하는 주체가 현장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변화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술을 만드는 방법뿐만 아니라, 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야 할 판단의 기준도 중요해진다.

전문 개발자가 아니기 때문에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접 만들 수 있게 된 만큼, 내가 만드는 기술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해야 할 책임도 함께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을 만들기 전에 질문해야 한다

나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거나 직접 만들 때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기술은 무엇을 해결하려는가?

기술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분명해야 한다.

둘째, 정말 기술이 필요한 문제인가?

어떤 문제는 기술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기술을 도입하기보다 사람을 더 배치하거나, 절차를 단순화하거나, 조직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기술이 가능한 것과 기술이 필요한 것은 다르다.

셋째, 더 단순하고 덜 침해적인 방법은 없는가?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굳이 더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할 필요도 없고,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할 필요도 없다.

가능하면 적게 수집하고, 단순하게 설계하고, 필요한 만큼만 자동화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기술일 수 있다.

넷째, 그 기술의 편익과 부담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조직은 편리해지는데 이용자는 더 어려워지지는 않는가?

관리자는 효율적이지만 노동자는 더 많은 감시를 받게 되지는 않는가?

디지털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편리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더 불편해지는 것은 아닌가?

기술의 편익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만들어내는 부담도 함께 계산해야 한다.

다섯째, 내가 당사자라면 이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관리자의 입장에서 편리한가가 아니라, 이용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회복지의 디지털 전환에서 중요한 질문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기술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서 나는 조금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기술을 좋은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더 빠르고, 더 똑똑하고, 더 많은 기능을 제공하는 기술.

최신 AI를 사용하고, 더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고, 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

하지만 사회복지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노인의 손이 떨린다면 훨씬 정교한 기술보다 버튼을 조금 크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기능을 계속 추가하는 것보다 필요한 내용을 반복해서 알려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기기를 구매할 여력이 없다면 최신 장비를 도입하는 것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오래된 태블릿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어쩌면 좋은 기술은 ‘가장 최신의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기술에 맞추지 않고 기술을 사람에게 맞추는 것

우리는 기술을 사용할 때 자꾸 사람에게 적응을 요구한다.

‘이 기능을 배우세요.’

‘이 앱을 사용하세요.’

‘이 기기에 익숙해지세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뒤집어볼 수도 있다.

| 왜 사람이 기술에 맞춰야 하는가?

기술이 사람에게 맞춰질 수는 없는가?

손이 떨리면 인터페이스가 달라질 수 있다.

기억하기 어렵다면 반복해서 알려줄 수 있다.

시력이 좋지 않다면 글씨가 커질 수 있다.

디지털 기기를 어려워한다면 기능을 줄일 수 있다.

이용자가 혼자 사용하기 어려워한다면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남겨둘 수도 있다.

이것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훨씬 중요한 기술일 수 있다.

기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사람의 삶에 맞게 변화하는 것.

나는 여기에서 사회복지의 디지털 전환이 다른 분야와 달라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느린 스마트(Slow Smart)

그래서 요즘 나는 ‘느린 스마트(Slow Smart)’라는 개념을 고민하고 있다.

느린 스마트는 기술을 거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디지털 전환을 늦추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술을 더 오래, 더 깊게 사용하기 위한 방식이다.

내가 생각하는 느린 스마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느린 스마트(Slow Smart)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사람의 삶과 필요에 맞게 천천히 조정하고 개인화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에게 더 유용해지도록 만드는 사회복지적 디지털 전환의 방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느리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최신보다 적합성을

느린 스마트에서는 새로운 기술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지금 가진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한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 시스템의 불편한 한 부분을 고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넣기보다 꼭 필요한 기능 하나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서비스를 만들기보다 사람들의 사용을 지켜보면서 조금씩 수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기술은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변화하는 과정이 된다.

나는 이것이 사회복지의 본질에 더 가까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복지 역시 한 번의 개입으로 사람의 삶을 완성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조정하고, 다시 시도한다.

필요에 따라 방법을 바꾼다.

기술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빠른 디지털 전환보다 좋은 디지털 전환

우리는 그동안 디지털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빨리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는지를 성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복지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다를 수 있다.

얼마나 빨리 도입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잘 맞는가.

얼마나 많은 기능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 기능이 실제로 필요한가.

얼마나 자동화했는가가 아니라, 그 자동화가 사람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술을 사용하는가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을 함께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디지털 전환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

생성형 AI와 바이브코딩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제 현장의 사회복지사도 자신의 문제를 기술로 표현하고 직접 작은 해결책을 만들어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기회다.

그러나 기술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을 만들지 않을 것인지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기술이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면 기술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사회복지의 디지털 전환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기술을 사람에게 맞추는 것.

최신보다 적합성을 선택하는 것.

새로운 것보다 이미 있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

한 번에 완성하기보다 사용하면서 계속 조정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기술을 사용할 사람의 삶에서 출발하는 것.

그래서 나는 디지털 전환의 질문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 ‘무엇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가?’에서 이미 있는 기술로 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조금 더 좋게 만들 수 있는가?로.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의 삶이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기술을 사용하는 것.

나는 그것이 사회복지에서 말하는 디지털 전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방향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름으로, ‘느린 스마트(Slow Smart)’를 생각하고 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G2gJfH51Tc5wVi2KdWroPxIQwSMIUksjsloX1HtMFeQ/edit?usp=s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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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정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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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정당하게!

― 생체정보 근태관리에 담긴 노동자의 권리

 

종사자 수당

 

얼마 전 시간외근무 인정과 관련된 한 장애인복지시설의 지침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시간외근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생체정보를 활용한 인증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확하게 관리하려는 것이니 필요한 것 아닐까?’

사실 그렇다.
근로자가 실제로 얼마나 일했는지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시간외근무를 하지 않았는데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는 일도 막아야 하고, 실제로 일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조직의 입장에서도 객관적이고 일관된 근태관리가 필요하다.

지자체나 법·제도가 일정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면 현장에서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관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다른 질문이 생겼다.

| 정확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과, 정확하게 관리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는 관리의 대상이기 전에 권리의 주체다

우리는 노동을 너무 익숙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계약된 시간 동안 일을 하고, 그에 따른 급여를 받는다.

하지만 노동자를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다. 자신의 개인정보와 사생활에 관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권리의 주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역시 근로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근로조건의 기준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이 권리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근태관리 역시 단순한 행정절차로만 볼 것이 아니라 노동권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관점이 달라지면 달리 보이는 것이 있다. 

조직이 근로시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노동자의 정보를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무엇을 확인할 것인지, 어떤 정보를 수집할 것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관리할 것인지 역시 따로 판단해야 한다.

특히 생체정보는 다른 개인정보와 조금 다르다.

비밀번호는 바꿀 수 있다.
카드는 재발급받을 수 있다.
휴대전화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지문이나 얼굴과 같은 신체적 특징은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없다.

물론 생체정보를 이용한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위험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보가 실제로 저장되는지, 원본이 보관되는지 아니면 별도의 형태로 변환되어 저장되는지, 어떤 보안조치가 이루어지는지에 따라 위험은 달라진다.

그럼에도 생체정보가 갖는 특성 때문에 보다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단순히 ‘지문인식이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로만 보고 싶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 정확한 근태관리라는 목적이 정당하다면, 노동자의 신체적·인격적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정당한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제도와 정책에는 대체로 목적이 있다.

부정을 막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일 수도 있으며,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목적 자체는 충분히 정당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수단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던지는 문제의식을 떠올렸다.

생체정보 근태관리를 차별의 문제와 동일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문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공통된 지점은 있다.

악의가 없다는 것과 그 결과가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자체나 기관이 노동자를 괴롭히려고 생체정보를 활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확한 근태관리를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지않을까? 모든 직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공정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의도였고, 목적도 정당했다고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제도를 평가할 때 그 제도를 만든 사람의 의도와 그 제도가 실제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선한 의도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당한 제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서 그 기준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왜 이 제도를 만들었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왜 이 방법이어야 하는가’를 함께 묻는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어떤 제도나 정책을 바라볼 때에는 다음의 질문을 차례로 던져볼 필요가 있다.

1. 목적은 정당한가

무엇을 위해 이 제도를 만들었는가.

그 목적 자체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

정확한 근태관리, 부정 방지, 공정한 수당 지급은 충분히 정당한 목적이 될 수 있다.

2. 이 수단은 정말 필요한가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현재의 방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할 수 있는가’와 ‘반드시 해야 하는가’는 다르다.

3. 보다 덜 침해적인 방법은 없는가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서도 개인의 권리를 덜 제한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더 강한 통제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4. 편익과 부담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이 제도로 누가 편해지고, 누가 그 부담을 감당하는가?

조직은 보다 정확하고 편리한 관리체계를 얻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정보 제공과 감시의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면 이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관리의 편의를 개인의 권리로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내가 당사자라면 이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가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제도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가 관리자일 수도 있고 노동자일 수도 있으며, 그 제도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 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위치에 놓일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이해관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원칙이 공정한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제도를 따른다는 것과 제도를 성찰한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현장에서 제도를 따라야 한다.

법을 지켜야 하고, 지침도 준수해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제도를 따른다는 것과 제도를 옳다고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현장에서 규정을 지키면서도 그 규정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질문할 수 있다.

오히려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그런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만이 우리의 역할이라면, 사회복지는 단순한 행정 집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복지사는 제도 안에서 일하지만, 동시에 그 제도가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피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책과 지침에 대해 ‘이것이 맞는가, 틀렸는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필요성과 정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도를 지키는 것과 제도를 성찰하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오히려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둘 다 필요하다.


 

정확하게 관리하는 것과 정당하게 관리하는 것은 같지않다

이번 지침을 보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결국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다.

정확한 근태관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확성을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다.

생체정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다르다.

그리고 좋은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 수단이 정당하다는 것도 다르다.

우리는 제도를 무조건 거부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제도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필요하다면 따르고, 필요한 곳에서는 질문해야 한다.

정확성을 추구하되, 그 과정에서 사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효율성을 추구하되, 그 편의를 위해 누군가의 권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체정보 근태관리의 찬반을 단순히 결정하는 것에 있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 정당한 목적일수록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지 더 엄격하게 살펴봐야 한다.

제도는 우리가 따르기 위한 기준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위한 제도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한다.

정확하게 관리하는 것과 정당하게 관리하는 것은 같은 것은 같은 것인가.

 

 

https://docs.google.com/document/d/1l_xH9IkEUoa7k-IBJ8pSHKOGPdn-Kh1lMGiQd8vOyI4/edit?tab=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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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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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사회복지원론에 대한 고민입니다.

 

2012.03.29 - [[楞嚴] 생각 나누기/[談] 복지 비틀기] - 유클리드와 사회복지학


유클리드의 원론처럼 사회복지학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단 하나의 명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를 뒷받침하는 공리는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왜 차별하면 안되는가?
왜 자기결정권은 존중되어야 하는가?
사회복지에서 사회정의는 무엇인가?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들어가면 사회복지는 왜 존재해야하는가?
사회복지사가 타인의 삶에 개입할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쉽게 칸트적으로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가치는 동등하다."으로 수렴할 수 있겠지만 현장 사회복지사로서는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 존엄은 현실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가 만드시 들어가야만 하는게 아닐까요?

한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되겠군요.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 존재이며, 사회는 모든 사람이 그 존엄을 실제 삶에서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두번째 떠오른 생각은 "사회복지실천에서 선의는 어디까지 보호될 수 있는가?"입니다.
출발은 선한 사마리안 법입니다.
사회복지사의 족쇄가 되는 여러 제도들을 보면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처우개선법이 수당 몇시간 추가하는 것에 목매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고작 우리 수준인가 하는 답답함이 치밉니다.
어짜피 사회복지는 기존 제도의 결함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도가 우리의 목줄을 죄고 있는게 맞는 방향성일까요?

선의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행동한 사회복지사의 행동이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타인을 도우려 할까요?
정보는 불완전하고 도움은 시급합니다.
물론 사회복지사에게 면책특권을 주자는 발상은 아닙니다.
합리적인 선의에 실천에 대한 안전지대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선배 사회복지사의 소명이다라는 생각입니다.
후배들이 방어적 사회복지를 하도록 사고가 갇히고 손발이 묶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구조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 사회복지사를 보호하는 것, 결과 편향으로 책임전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책임의 공공화를 만들어 가는 것

사회복지사가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그 순간, 책임있게 도움을 주려는 행위가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26. 8. 26.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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