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아주 많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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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한번쯤은 읽어본 적이 있는 동화일 겁니다.
대충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이렇지요 ^^


아주아주 많
은 달 (1944년 칼뎃콧상 수상)

- 저자 : 제임스 서버(James Thurber)


옛날 어느 나라에 어린 공주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던 공주는 어느날 하늘의 달을 보고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든거예요. 그래서 임금님께 달을 따다 달라고 보채기 시작했지요.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공주 때문에 속이 탄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물었지요
그러나 과학자, 건축가, 의사 등은 한결같이 여러 이유를 대며 공주님에게 달은 따 올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주님, 달은 너무 멀리 있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공주님, 달은 너무 크고 무거워 따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은 막무가내였고, 마침내 앓아눕기까지 했답니다.
이때 공주님과 친하게 지내던 광대 한명이 나타나 누워있는 공주님께 물었습니다.

 광대 : 공주님, 달은 어떻게 생겼나요?
 공주 : 달은 동그랗게 생겼지.

 광대 : 그러면 달은 얼마나 클까요?
 공주 : 바보, 그것도 몰라? 달은 내 손톱 만하지. 손톱으로 가려지잖아.

 광대 : 달은 얼마나 높이 떠 있을까요?
 공주 : 가끔 앞뜰 나뭇가지에 걸리는걸 보면 큰 나무보다 높지 않아.

 광대 : 그럼 달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공주 : 달이야 황금빛이 나니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지.

 광대 : 알겠어요. 공주님, 제가 가서 달을 따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공주님의 방을 나온 광대는 임금님께 아뢰었지요.
그리고는 나무에 걸린 달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따서는 공주님께 전해드렸답니다.
물론 그 달은 황금으로 만든 손톱만한 크기의 동그란 구슬이었지요.

공주님은 뛸 듯이 기뻐하였고, 아픈 것도 다 나았답니다.

그런데 문득 걱정이 생겼어요.
밤이 되면 어김없이 달님은 또 떠오를테니까요.

밤이 되자 달이 뜨고, 광대는 다시 공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광대 : 공주님, 달을 따왔는데 오늘밤 또 달이 떠 있네요. 어떻게 된걸까요?
 공주 : 이런 바보, 그것도 몰라? 이를 빼면 새 이가 또 나오지?
          그것과 같은 거야 달은 하나를 빼오면 또 나오게 되어있어.
 광대 : 공주님, 그렇네요. 제가 몰랐답니다. 공주님께 또하나 배웠네요.

※ 내용이 정확하지는 않을 겁니다. 인터넷을 뒤지고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 하였습니다. ^^



기억 나세요? 어쩌면 우리는 상담의 기본 원칙을 이때 이미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공주님이 여러분이 지금 만나고, 전화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 누구누구 같지는 않나요?

혹시 공주님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제 말좀 들어보세요", "그게 아니구요", "그렇게 말씀 하시면 안되죠"

자.. 이제 어떻게 얘기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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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의 직업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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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Self-Pity by D.H. Lawrence)

"난 자신을 동정하는 야생동물을 보지 못했다.
동사凍死하여 나무에서 떨어지는 새조차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영화 지아이제인(G.I. Jane)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사회복지사업을 수행하는 나에게 결코 약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버팀목으로 남아있다.


사회복지정보원(http://www.welfare.or.kr/)에서 제공하는 "복지요결"에도 같은 말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몇마디 말들에 대해 명쾌하고 솔직하며, 칼날같은 답을 남기고 있다.
혹시 이런 말들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첫째, 사회복지사는 가난하다? 정말로 그럴까? 당신은 가난하게 사는 사회복지사를 만난적이 있는가? 난 아직까지 사회복지사를 하다가 영세민(?)이 되었다는 선배를 만나보지 못하였다. 약간의 욕심만 버린다면 우리는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급여는 받고 있다.
오히려 나의 능력이 내가 받고 있는 급여에 미치지 못할까를 염려해야할 것이다.

둘째, 사회복지사는 힘들다? 정말로 당신은 힘이 드는가? 정작 힘든 일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다 해주고 있지는 않은가? 온갖 잡무에 시달린다고? 그런 잡무를 하면서 우리만큼 많은 좋은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보다 편한 직업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지 돌이켜 보라.
사회복지사는 그것을 평가하고 감시하고 채찍질하는 구조로부터 비교적 압력을 덜 받고 있다.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고, 견제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며 경쟁은 블루오션Blue Ocean에서 헤엄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 네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더냐?

셋째,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사회복지현장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학교에서 배운 지식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깨우치게된다. 우리가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배운 것이, 아니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고 어설프기 때문은 아닐까? 이론과 현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론도 다양하고 현실도 다양한데, 이것들이 적재적소에 잘 적용되어야 함에도 내 공부가 부족하여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니 자신을 탓해야할 것이다.

넷째, 사회복지 현실이 열악하다? "만약 ... 했더라면" 등의 환경 탓을 하면서 복지사업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제 손에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조건만을 탓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 할 수 있을까?"라는 해결방안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조건부적 사고가 아닌 방법론적 사고를 하자.

마지막으로, 사회복지사는 전문가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분명 전문성을 요구하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들이 스스로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나서고 전문가로 인정해 달라고 하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기 전에,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대접받으려고 아등바등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과연 나는 전문가로서 인정받을만 한가?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사회복지사여, 결코 스스로를 동정하지 말며, 어설프게 아는 얕은 지식을 염려하라.

[참조] 사회복지정보원, http://www.welfare.or.kr, 복지요결

※ 평소에 생각하던 부분들로 정리해보고자 했는데, 마침 먼저 잘 정리한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복지요결의 이야기를 모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상의 직업윤리로 정리한 것처럼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던 신화神話는 깨어져야 할 것이라 믿는다.


부숴야할_신화_v1.1.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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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로서의 클라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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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자의 권리로써의 사회복지를 이야기 하면서 많이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소비자’이라는 개념이다. 과거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대상자로서의 클라이언트를 사회복지서비스를 구매하고 또 활용하는 주체로서 승격시킨 것이 소비자의 개념이며, 이제는 거기서 더 한걸음 나아가 사회복지사가 응대해야할 ‘고객’으로 칭하고 있다. 이는 이제 고객만족, 고객감동을 실현해야만 경쟁적 복지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클라이언트를 소비자로 인정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없을까?
이처럼 클라이언트를 소비자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 의문의 시작이다.

클라이언트를 소비자로 규정하는 순간 등급이 생기고 차별이 발생한다. 지금껏 사회복지는 생산보다 분배를 우선시하고 가진 자로부터 못가진 자로의 자원 이동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등급과 차별을 조장하는 개념을 사회복지에 도입하고자 함은 그 자체로서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과 다름아니다. 또한 이는 영리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한계점들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기능을 해온 사회복지에 있어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소비자와 클라이언트는 엄연히 다르다. 클라이언트는 클라이언트다. 소비자는 영리기관이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만이다. 억지로 클라이언트를 소비자에 끼워 맞추려 하지말자. 사회복지서비스 이용자로서 클라이언트를 클라이언트라 받아들이면 뭐가 문제인가?

소비자로서의 클라이언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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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서비스의 영리화에 따른 문제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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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도입은 본격적인 사회복지서비스의 영리화 추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댓가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수익모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연 이러한 시도는 타당하고 적합한 판단일까? 지금껏 비영리기관으로 존재해온 사회복지기관이 영리사업에 뛰어듦으로 인해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고되어 있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회복지기관에 취업해있는 요양보호사가 요양보호등급을 받은 사람과 짜고, 실제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은채 보험수가를 신청해서 그 금액을 나누어가졌다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까?
물론 당연히 '안돼'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두명이 짜고 한다면 실제로 기관에 알기는 어렵다. 그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 소양교육도 실시하고 모니터링도 실시하지만, 허점은 너무 많다.
서류는 완벽하다. 일지도 작성되어 있다. 요양보호사와 피요양보호인은 절대 그런일이 없다고 잡아뗀다. 이 두명은 절대로 잘못을 인정할 의사가 없다. 사회복지서비스의 특성상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기 때문에 정황증거 이외엔 다른 물증은 없다.

이럴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입증 책임은 누가 져야만 할까? 마냥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의 양심에만 맡겨야 하는 것일까?

기존에 비영리 기관이었던 사회복지기관은 후원금/보조금 횡령이라는 기관의 조직적인 비리가 아니고서는 종사자에 의한 혹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이루어지는 금전적 사고나 문제를 찾기 어려웠다. 이는 실제 그럴 수 있는 돈이 없기도 하겠거니와, 근본적으로 클라이언트가 받는 서비스에 대해 어떤 댓가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로부터 클라이언트에게로 일방적으로 그리고 무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대상자 선정의 형평성에 대한 문제만 제기 되었을 뿐 금전적 비리에 대해서는 발현의 여지가 적었다는 말이다. 사회복지의 목적이 클라이언트의 자활에 있지 수익의 창출에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며, 더불어 비영리기관에 소속된 사회복지사는 그들의 존재가치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해왔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인장기요양보험공단이라는 제3자가 끼어들고 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는 노동의 댓가로 돈을 원하는 사람이지, 사회복지를 배우고 실천하는 전문가로서의 사회복지사가 아니다. 제3자의 개입은 다른 문제의 발현 가능성을, 서로 다른 목적은 태생적으로 영리조직이 갖는 문제의 발현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요소로 인해 만일 실제로 문제가 발생하였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때 그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은 사고를 친 요양보호사일까? 서비스를 제공한 기관일까? 또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입증을 할 책임은 누가 져야하는 것일까? 기관일까? 노인장기요양보험공단일까? 국가일까?

솔직히 빤히 보이는 문제마저 충분한 검토와 개입 및 책임절차들을 준비하지 않은 채, 기존의 사회복지기관에게 떠넘긴 채 시작되고 있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공무원들의 제도시행에 따른 혼란과 우왕좌왕하며 눈에보이는 실적에만 목매는 작태! 진정 클라이언트를 위한 사회복지서비스가 맞단 말인가? 그 태생이 다른데, 제공하는 서비스가 비슷하다고 사회복지기관에서 하라고 밀어붙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

이건 클라이언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다. 어쩌면 수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건  이미 비영리기관인 사회복지기관의 몫이 아니건 아닐까? 기존에 우리가 해오던 사업이라고 아쉬워할게 아니라 영리기관에서 하라고 훌훌 털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이 못하는 또다른 영역에 있어의 개입을 시도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애시당초 있지도 않았던 문제가 생기고 또 고민이 생긴다. 우리 것이 아닌데 쥐려고 하는 집착이 주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도 또 다른 것이, 사회복지기관에서 이것을 쥔채 놓지 않으려 하는 바탕에는 클라이언트를 위하는 마음에서 있다. 복지사각지대로 몰릴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비전문가에 의해 자행될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 그로 인해 고통받을 클라이언트, 그리고 그것을 눈감고 모른체 할 수 없는 사회복지사의 양심이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누군가의 비난을 받고, 또 책임을 지고 힘겨워할 사회복지사
그들이 안쓰러워 내뱉는 푸념이고 한숨이다.
우리는 과연 이 격랑기에 어디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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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에 관한 조금은 위험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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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고 ※



이 공간에는 사회복지에 관한 다소 위험한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복지를 이야기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
그것들에 대해 과연 진짜 그러한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장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담기는 내용들은 다소 근거가 빈약할 수도 있으며, 억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주 빈약한 사회복지에 대한 가치와 원칙, 대응논리들을 찾기 위한 작은 시도는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나씩 하나씩.. 시작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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