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만들 수 있는가에서, 만들어도 되는가로 #3
느린 스마트(Slow Smart)
― 기술을 사람의 삶에 맞추는 사회복지적 디지털 전환
우리는 디지털 전환을 이야기할 때 자꾸 속도를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빨리 도입했는가?
얼마나 최신의 시스템을 갖추었는가?
AI를 얼마나 많이 활용하는가?
얼마나 많은 업무를 자동화했는가?
성과를 이야기할 때도 비슷하다.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가?
비용이 얼마나 절감되었는가?
처리량이 얼마나 늘었는가?
이런 지표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복지에서 이것만으로 디지털 전환을 평가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최근 이 질문에서 ‘느린 스마트(Slow Smart)’라는 개념을 고민하고 있다.
느린 스마트는 기술을 천천히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느린 스마트라는 말은 기술을 무조건 느리게 도입하자는 뜻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거부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기술의 속도를 사람의 삶의 속도에 맞추자는 것에 가깝다.
내가 생각하는 느린 스마트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느린 스마트(Slow Smart)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제공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한 사람의 삶과 필요에 맞게 천천히 조정하고 개인화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에게 더 유용해지도록 만드는 사회복지적 디지털 전환의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느리다’가 아니라 ‘사람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왜 최신 기술이 항상 좋은 기술은 아닐까
노인복지 현장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다 보면 이런 장면을 쉽게 만난다.
새로운 기기가 들어온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좋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용자는 그 기기를 잘 사용하지 못한다.
버튼이 너무 작다.
화면이 복잡하다.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 기억하기 어렵다.
손이 떨려 정확하게 터치하기 어렵다.
새로운 기능을 배운다고 해도 몇 주 뒤 잊어버린다.
기술은 좋아졌는데 사람에게는 더 어려워진다.
이때 우리는 흔히 이용자에게 다시 배우라고 한다.
‘디지털 역량을 높여야 합니다.’
‘반복해서 사용하면 익숙해집니다.’
‘요즘에는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볼 수도 있다.
왜 사람이 기술에 맞춰야 하는가?
기술이 사람에게 맞춰질 수는 없는가?
좋은 기술은 사용자를 바꾸는 대신 환경을 바꾼다
예를 들어 손이 떨리는 사람이 있다면 버튼의 크기와 간격을 조정할 수 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반복적인 안내나 알림을 제공할 수 있다.
새로운 기기를 사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는 오래된 태블릿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첨단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술의 수준이 아니다.
그 기술이 그 사람에게 맞느냐이다.
나는 이것이 사회복지에서 말하는 개인화와 디지털 전환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개인화 서비스를 이야기하면서 더 정교한 AI, 더 많은 데이터, 더 높은 정확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개인화의 본질은 어쩌면 훨씬 단순하다.
한 사람의 특성을 알아차리고, 그 사람에게 맞게 환경을 조금씩 바꾸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술은 훨씬 인간적이 될 수 있다.
느린 스마트는 '새로운 것'보다 '이미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디지털 전환은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일이 되어버리기 쉽다.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고,
새로운 기기를 사고,
새로운 앱을 설치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한다.
하지만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오히려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이미 있는 기술로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오래된 태블릿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활용할 수 있다.
이미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필요한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다.
기존 시스템의 불편한 부분 하나만 개선할 수도 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새로 만드는 대신, 종이로 하던 한 가지 절차만 디지털화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 실제로 불편해하는 한 지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느린 스마트는 혁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단위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느린 스마트는 기술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계한다
기술 중심의 디지털 전환에서는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떤 기술을 도입할 것인가?
느린 스마트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한다.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어려워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기술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순서가 다르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그래서 느린 스마트에서는 기술의 성능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한 번에 완벽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면서 고친다.
처음부터 모든 기능을 넣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능부터 시작한다.
사람이 적응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계속 조정한다.
그 과정에서 기술은 점점 그 사람에게 맞아간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한 도구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하고 유용한 생활의 일부가 된다.
기술이 사람에게 적응하는 것이다.
사회복지의 디지털 전환은 결국 사람을 향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디지털 전환을 많이 이야기했다.
효율성을 높이고,
업무를 자동화하고,
데이터를 활용하고,
AI를 도입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기술을 도입했는데 이용자가 더 불편해진다면?
업무는 빨라졌는데 관계가 줄어든다면?
데이터는 많아졌는데 당사자의 목소리는 작아진다면?
AI는 더 정확해졌는데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디지털 전환의 성공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디지털 전환은 기술의 발전을 증명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사람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느린 스마트를 이렇게 생각한다.
빠른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속도를 존중하는 기술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필요한 기술
사람을 기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사람에게 맞추는 것
한 번에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면서 계속 조정하는 것
결국 느린 스마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술을 늦추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앞세우자는 것이다.
우리가 디지털 전환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기술도, 더 빠른 기술도, 더 복잡한 기술도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좋은 기술은 사람이 기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사람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디지털 전환의 질문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무엇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가?에서
이미 있는 것으로 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조금 더 좋게 만들 수 있는가?로.
그리고 결국,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더 좋기 때문에 만드는 것.
나는 그것이 사회복지에서 이야기하는 디지털 전환의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고민하고 있는 ‘느린 스마트’다.